종합
조선일보
2026-06-14T18:00:00
말과 개념의 인플레 시대… 지금 필요한 것은 ‘핍진(逼眞)’의 태도
원문 보기가히 말과 개념의 인플레 시대다. 미디어를 자처하는 플랫폼들의 범람 때문일까, 아니면 정치 과잉 탓일까. 언제부터인지 ‘말’들이 급증해, 우리 주위를 유령처럼 떠돈다. 그 말들은 정보의 무심함으로, 비난의 송곳으로, 번잡한 소음으로 우리를 괴롭히고 찌른다. 말이 많아질수록 말은 가벼워지고, 개념이 넘칠수록 개념은 실체에서 멀어진다. 말이 사물을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사물을 가리는 장막이 되는 순간이다.동양 고전 주역(周易)의 64괘(卦), 384효(爻)는 말과 개념의 거름망이다. 괘(卦)는 세계와 인간사의 큰 형세를 여섯 개의 선으로 그린 상징이고, 효(爻)는 그 괘를 이루는 각각의 자리와 변화다. 하나의 괘는 여섯 효로 이루어지고, 64괘에 여섯 효씩 붙으니 모두 384효가 된다. 수천 년에 걸쳐 양산된 수다한 메시지들이 걸러지고 정제되면서 64괘, 384효와 결합했다. 주역은 헛된 말과 과장된 개념에 강력한 내성을 가진 체계다. 요즘처럼 이상 증식한 말들이 일상을 어지럽히고 나를 아프게 할 때, 주역은 훌륭한 면역의 도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