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조선일보 2026-03-30T15:41:00

[일사일언] 할머니의 ‘비닐 서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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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비닐봉지를 버리지 못하는 분이셨다. 과일을 담아온 봉지, 빵집에서 받아온 봉지, 구겨지고 찢어진 것까지 부엌 서랍 한쪽에 꾸역꾸역 눌러 담으셨다. 서랍을 열면 울긋불긋한 봉지가 쏟아져 나오다 못해, 봉지를 잔뜩 구겨 담은 봉지가 몇 꾸러미나 더 있었다. 제발 좀 버리시라는 말에도 요지부동이셔서, 몰래 몇 봉지를 버리기까지 했다. 물건 사면 보통 공짜로 주는데, 비닐봉지가 대체 얼마나 한다고. 그러다 한참 뒤에야 알게 됐다. 할머니가 젊으실 적엔 실제로 비닐이 꽤 귀한 물건이었다. 국내 석유화학 산업이 자리 잡기 전의 궁핍한 시절에 들인 습관이신 게다.현재 우리나라는 석유 수출국이다. 원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석유 제품 수출 연간 407억달러라는 성과를 내고 있다. 이런 구조가 갖춰지게 된 데는 과거 남북 간 체제 경쟁도 한몫했다. 석유가 없던 북한은 석회석과 무연탄에서 제조한 비날론(vinalon)이라는 합성 섬유를 ‘주체(主體) 섬유’로 내세웠다. 반면 우리는 그런 기술이 없어 차라리 원유를 들여온 후 정제하는 데 집중하게 됐다. 그렇게 두 차례 오일 쇼크를 겪으면서도 우직하게 정유 산업을 밀어붙인 결과가 지금의 값싼 비닐이다. 오죽하면 환경부담금을 내야만 비닐을 줄 수 있게 바뀌었을까.